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0-02-08 09: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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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성당을 찾았다. 문대통령 모친 장례식이 치러졌던 곳이다. 가톨릭의 장례에 대한 생각을 엿보고 싶었다. 마침 장례가 있었다. 분위기는 단출하면서 단아했다. 병원 장례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떠들썩할 이유가 없었고 장례지도사에 휘둘릴(?) 일도 없었다. 성당 내에 염습실부터 안치실 그리고 접견실과 식당까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관리자에 의하면 평신도들이 이미 장례지도사 자격을 갖추고 염습까지 서비스 하고 있었다. 문대통령의 모친 시신을 병원에서 즉시 성당으로 운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정해진 장례비용도 없었다. 미사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끝이었다. 식당에서 접대하는 음식조차도 조문객 개인당 카운트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양만큼 주문해서 적게 먹으면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 먹고 많이 먹으면 더 주문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바가지 쓸 일이 없었다. 합리적이었다.
장례식장으로 쓰이고 있는 접견실과 식당은 장례가 없을 때는 기도실과 주일 날 식당으로 쓰였다. 관리자는 ‘멀티 공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출입구는 본당과 따로 있어 조문객과 일반 방문객이 맞부딪힐 일이 없었다. 성당마다 모두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본 성당 신자만이 아니라 작은 성당의 신자들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 규모가 적은 성당에 대한 나눔과 배려였다.
돌아 나서며 많은 생각에 잠기었다. 1980년대 초 아파트 문화가 들어서면서 병원 장례식장이 생겨났다. 교회는 죽음을 병원에다 떠 넘겼다. 마치 삼손이 머리를 깎인 것과 같은 꼴이었다. 교회는 힘을 잃었고 목회자는 외면당했다. 병원이 교회 기능을 대신했다. 목회자 대신 장례지도사가 성경을 읽고 핸드폰으로 찬송을 틀어준다. 목회자들은 소외되고 교인들은 속절없이 그들의 인도를 따라 장례를 치른다. 미신과 민속과 우상숭배의 요소들이 난무한다. 장례비용은 고가(高價)다. 죽음 앞에서 죽음의 의미를 새길 겨를도 없다. 경건함은커녕 죽음을 파고 사는 시장 통만 같다.
수년 전 강준만 교수는 정당정치와 관련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이 제안한 ‘교회 모델’ 즉, ‘서비스 모델’을 꺼낸 일이 있다.
“저는 결혼식, 장례식 때 교회만큼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을 본 적이 없어요. 신도나 그 가족이 아프면 교인들이 와서 간병까지 해줘요. 친척보다 더 낫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대가족제를 유지합니다. 오늘 태어난 아이부터 내일 돌아가실 분까지 하나의 가족입니다. 실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정서적 유대감이 큽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아예 집을 한 채 구해서 상설 노인정을 운영합니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왠지 나는 ‘교회 모델’과 ‘서비스 모델’이 한 없이 서글펐고 부끄러웠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죽음(시 116:15)을 포기한 것일까?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헛구호인 것일까? 이다지도 공간철학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컨설턴트 박성민은 교회의 겉모습만 보았던지 착각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성당을 걸어 나오는 내 발걸음이 후둘 거렸다.

(첫번째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 모친 장례식 때의 모습이다. 두번째 사진은 당일 장례식장의 모습이다. 대통령 모친이라고 특별하지 않았다. 나머지 사진들은 성당내의 시설들 모습이다. 시설들은 다소 낡았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장례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과 콘텐츠는 따로 없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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