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0-02-09 09: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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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하나.
교회 주차장. ‘니가 뭔데 갑질이야’, ‘너는 왜 협조 안 해?’ ‘네가 뭔데 지시해?’
교회에 완장을 찬 사람들이 등장했다. 손에 든 주차봉은 데모데 진압무기만 같다. 발렛 파킹은 못해줄지언정 표정부터가 영 아니다. 느닷없는 핀잔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안수집사들의 ‘완장권세’다.
#. 풍경 둘
이번에 교회 식당. ‘가져가지 마세요.’ ‘아니 저건 뭔데요?’ ‘다른 사람 줄 거예요.’
교회 식당. 권세 중 권세는 주방의 ‘(밥)주걱권세’다. 눈을 흘겨보는 레이저의 눈빛이 무섭다. 교회의 모든 소문의 진원지가 식당이다.
그러다가 폭발하면 애매한 목사를 찾는다.
“내가 한마디 할 거예요”
“그냥 참으시는 게 낫겠는데요?”
“아뇨! 내가 말 안하면 그 사람 평생 자기가 옳은 줄 알고 살 거예요~”
“에휴~ 사람이 잘 변하지 않으니~ 아마 그분이 인생이 힘들어서 그런가 봐요.”
“인생 자기만 힘든가요? 따질건 따져야겠어요.”(우암칼럼에서)

목사에게 주일 하루는 지뢰밭 같이 아슬아슬할 때가 있다. 목사의 가슴은 늘 새가슴이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저들끼리 만이 아니다. 다짜고짜 목사에게 시비를 걸어온다. “목사님은 태극기 부댄가요?” “오해될 말씀은 삼가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뿐이 아니다. 설교에 다짜고짜 시비다. “목사님 요새 바쁘신가 봐요?” “왜요?” “목사님 설교가 힘이 없다고 소문이......”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설교를 한 번도 안하셔요. 자신이 없나봐요?” “목사님, 장 OO목사처럼 재미있게 해 주시면 교인들이 덜 졸고 있을 것 같은데요.” 교회 설교품평회 심사를 맡으러 온 사람들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가 아는 여주의 Y목사는 은퇴하면 자기는 ‘다시는 교회 안 나간다’고 했다. 어쩌다가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운 예수를 이렇게도 추하게 소비하게 된 것일까? 한국교회 민낯에 속상한다. 오죽하면 <상식성자(常識聖者)>란 말이 나왔을까? 상식적으로 살아도 성자가 될 수 있다니....

천로역정의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줄거리도 주인공도 바뀌지 않았을까? 스치는 바람에도 삐치고 토라진다는 쌍둥이 ‘삐지리와 섭서비’ 명예권사, 무덤에서도 이거저거 간섭하고 시비 걸 거라는 ‘고지비’ 은퇴장로, 뺀질뺀질 지독히도 말 안 듣는 ‘뺀도리’ 교인, 세상 상처 혼자 짊어지고 잠수 탄 ‘낙시미’ 교인, 온갖 치장으로 마치 패션쇼 하듯 설쳐대는 허장성세의 ‘위서니’ 집사, 분위기 잡아 놓고는 핫바지 방구 새듯 사라진 ‘빤짜기’ 잡사, 제직회 때면 어김없이 소리를 질러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왕버럭’ 집사, 교회 잔치 끝에 음식 챙겨 떠나는 ‘궁상이권사’......
어쩌다가 이렇게 교회는 이다지도 천박해졌을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 것보다 더 슬프고 끔찍한 일은, 사랑하는 여자를 얻고 나서 그녀가 ‘얼마나 천박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아름다움을 잃으면 어디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