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0-02-07 09: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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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왕이 서거하면 소리쳤다. “왕이 죽었다, 국왕 만세(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죽은 사람을 놓고 오래 살라고 하다니.... 왕에 대한 반역죄가 아닌가고 여길 때가 있었다. 한참 뒤에야 깨우쳤다. ‘왕은 죽었다. 왕권은 만세토록 계속된다.’는 것을. 그렇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새로운 탄생, 시작이 있다.
이런 해석이 붙어야만 이해되는 서양과 달리 우리말에는 ‘끄트머리’가 있다. 끄트머리란 ‘끝’과 ‘머리’가 합쳐진 말이다. 영어의 ‘ending’이나 한자어의 ‘終’과 달리 ‘끝에서 시작을, 시작에서 끝’을 바라보는 통섭의 언어다.
끄트머리는 언제나 희망이다. ‘마른 행주 짠다고 물 나오나?’고 비아냥거린다. 아니다. ‘우린 마른 행주로 거울 닦고, 잉크 찍어 그림 그린다.’ ‘버스 지난 다음에 손든다고?’ 그도 틀렸다. ‘버스 지난 다음에 택시 잡는다.’... 어쩔 텐가? 인생의 막바지요 낭떠러지라고 여겼던 희망의 끝이 실은 골목이 꺾이는 길모퉁이일 뿐인 것을.
끄트머리는 대 역전의 드라마다. 잠드는 저녁을 생각해 보라. 하늘 높이 있던 머리는 바닥으로 눕는다. 대신 발이 하늘을 향한다. 두 팔 벌려 만세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 중 법관이 있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임용이 늦어졌다. 동기들의 끝만을 따라 다녔다. 지방판관으로만 맴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호령하셨다. ‘제자리 서’ 이어 ‘뒤돌아’라는 명령과 함께 ‘앞으로 가’라고 하는 순간, 자신이 1등이 되어 있더라고 했다. 꼴찌여서 1등이 될 수 있었다는 거다. 동기들 중 가장 먼저 대법관 자리에 올랐다. 김신 전대법관 이야기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살던 나라가 세계 경제대국 10위가 된 것이야말로 불가사의 중 불가사의다. 세계인들은 여전히 궁금해 한다. 끄트머리의 유전자 덕이다. 서양인들은 희망(Hope)을 이렇게 풀이한다. ‘Hold on. Pain ends’(끝까지 참아내. 시련은 끝날 거니까!) 우린 긴 말이 필요 없다.
‘끄트머리’, 언제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