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2-01-26 09: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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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웃음, 어머니 시집가시던 날’ ‘왕 할아버지 안~녕’ ‘폴 세잔의 사과’ ‘잘 자라 내 아가!’ ‘나들이’.

영화 제목이 아니다. 내가 치른 장례의 주제들이다. 주제만이 아니다. 장례에 대한 유쾌한 반란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값비싼 수의(壽衣) 대신 평상복 입기, 종이 관(棺) 쓰기, 추모단을 생화 화분으로 꾸미기, 염습을 사후 메이크업으로 바꾸기. 또한 ‘왜 상주(喪主)는 남자여야만 하는지?’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해 장례 속에 깊숙이 파고든 성차별을 깨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장례감독’이란 칭호가 붙었다. 유가족 중 젊은 엄마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혼에 웨딩 플래너가 있듯이 장례에는 당연히 엔딩 플래너가 있어야 옳다. 나는 이를 민간 자격증 코스로 운영하고 있던 터라 ‘장례감독’이란 말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장례는 그 집안의 마지막 얼굴이다. 장례 속에 고인이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담긴다. 장례를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장례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라 했다. 그렇다. 사람이 동물이지만 동물이 사람은 아니다. 장례의 품격이 곧 그가 된다.

장례감독인 내가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은 장례 대본이다. 고인의 살아온 스토리가 풍성하면 절반은 성공이다. 고인이 주인공, 유족들이 조연으로 참여한다. 명대사를 고르고 라스트 신을 어떻게 연출해 낼 것인지 고민한다. 추모단 세트도 점검해야 한다. 유가족들의 심리 상태도 돌봐야 한다. 영화감독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감독은 대부분 픽션을 다룬다. 장례감독은 논픽션만을 다룬다. 영화는 흥행에 성패가 좌우된다. 장례는 문상객의 숫자가 아닌 심장 박동수를 헤아린다. 장례감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 이야기’를 지켜보는 특권을 누린다. ‘인생은 원더풀, 떠남은 뷰티풀’의 명장면 말이다. 드디어 막이 내린다. 영화의 ‘엔딩(Ending)’과 달리 장례는 ‘Anding’이다. 삶이 계속된다는 의미에서 내가 만든 말이다. 장례가 산 자들에게 묻고 있다.

“너희는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자상했는가? 남들을 보살피고 동정하고 이해했는가?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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