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0-02-25 09: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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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교수는 자궁(womb·움)과 무덤(tomb·툼)이 놀랄 만큼 닮아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게 죽는 거라며 기저귀가 까칠한 수의(壽衣)와 닮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이 말이 얼른 다가오지 않는 이들은 정원지기 김순현목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정원’에 자리한 무덤에 묻히셨다.(요 19:41-42, ‘동산’의 또 다른 번역은 ‘정원’이다) 그분은 정원에 심어진 한 알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이 움터 올라 전혀 새로운 생명의 꽃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의 꽃을 피워낸 무덤은 새로운 생명의 모태가 아니었을까?”
난 그 꽃의 이름을 긍휼의 꽃이라 불러주고 싶다. 이유가 있다. ‘긍휼’이라는 히브리 언어는 ‘라훔’이다. 이 ‘라훔’의 어원이 ‘레헴’으로 ‘자궁’을 말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렇게도 죽음을 기피하고 묘지를 멀리할까? 어릴 적 경험으로 묘지는 마을의 중심에 있었다. 낮부터 해가 기우는 시간까지 무덤에서 놀았다. 놀이터였다. 미끄럼을 탔고 공을 찼다. 훌륭한 잔디구장이었다. 저녁이 되면 청춘남녀들의 차지였다. 은밀한 데이트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건축가 승효상님은 이렇게 말한다.
“도시가 지속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이나 장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신성하고 경건한 침묵의 장소라고 했다.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어쩔 수 없는 도시 일상이라고 해도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맑게 빚는 고요함이 없으면 도시는 이내 피로하여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와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사이에 아고라(Agora)를 두어 각기 신과 죽은 자와 산 자의 영역으로 삼았으며, 시대를 거듭하여 종교의 형태와 생활의 습속이 변해도 신을 받드는 시설과 묘역은 부랑자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현대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옛 마을에는 묘역이 가까이 있었고 개인의 집에는 사당이 있었으니 재각(齋閣), 비각(碑閣), 제공소(祭供所), 서낭당 등 많은 시설이 영혼과 관계하는 경건과 침묵의 영역으로서 우리의 정신을 가다듬게 하고 마음을 곧게 했다. 그러나 지난 시대 이 땅에 분 개발 광풍으로 도시가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부동산의 공동체로 변하면서, 묘역은 우리의 일상과 공존할 수 없는 혐오시설이 되어 쫓겨났고 재물의 맛에 취한 교회와 사찰은 시장보다 더 상업적인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도시에서 마음을 고요케 하는 성소를 찾는 일이 이제는 도무지 쉽지 않다.”
하이패밀리에는 바로 이 성소(聖所)가 있다. <소풍가는 날>이라 이름 붙여진 수목장이다. 삶과 죽음이 한 묶음으로 자리한다. 마음이 심란하고 번잡할 때면 수목장 광장을 거닌다.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과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때 연주된 구스타프 말러의 제5번 교향곡 중 4악장인 <아다지에토>의 선율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먼저 떠난 이들이 말한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Hodie Mich Cras Tibi)

묘비의 성경구절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들이 평생 사랑했던 말씀들이다. 마음산책은 어느 사이 작은 예배가 된다.
언덕배기의 모자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꼭 내 어머니를 닮았다. 한 쪽 젖가슴이 없다. 누군가가 뜯어 먹었다. 젖가슴이 사라진 자리에 어린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다.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엄마를 조용히 불러본다.

<어머니는 옛살비>
어머니가 숨 거두기 전 들려준 말은
“어머니가 자꾸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운명하면서 마지막 한 말은
“엄마”

내가 폐렴 걸려
죽음의 언저리를 떠돌 때
끓는 손을 들어 애타게
허공을 휘저으며 잡으려던 것은
이미 세상에는 없는
어머니의 손

어머니는
언제나 그립고 사무치는 옛살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위험할 때
작아지고 가벼워져 바스라지려 할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소리
마음의 근원 옛살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옛살비 옛살비 옛살비
부르면 눈물이 나고 목이 메는
부르면 따뜻해지고 힘이 솟는
어머니는 옛살비
옛살비는 어머니-차옥혜

‘고향’의 순 우리말이 옛살비다. 누군가가 말했다. ‘어머니가 계신 곳이 고향’이라고. 누군가 저 아래서 추모의 종을 치고 있다. 어릴 적 내 엄마가 그만 놀고 저녁 먹으라고 부르던 목소리만 같다.

나는 이 거룩한 성소(聖所)에서 매일같이 다시 태어난다.

(황성주 박사 부부도 이 곳을 자주 찾는다. 그도 나처럼 어머니가 그리운 것일게다. 모자상 곁에 황성주박사의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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