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4-04-18 08: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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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도 인칭(人稱)이 있다. 나의 죽음은 1인칭 죽음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2인칭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은 3인칭 죽음이다. 1인칭 죽음, 나의 죽음은 내가 경험할 수 없다. 내가 알 수 없다. 2인칭 죽음,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비로소 죽음을 경험한다. 나에게도 다가올 사건으로 인식한다. 3인칭 죽음, 타인의 죽음은 나와 무관한 죽음이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Jankelevitch, 1952~1973)가 <죽음(La mort)>을 통해 밝힌 이론이다. 1966년의 일이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다. 임종학자인 나에게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3인칭에서 2인칭으로 전환해 볼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고민거리다. 이를 신학 용어로는 ‘죽음의 선취(先取)’라 부른다.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3인칭의 죽음을 ‘미리’ 가져오는 일이다. 그때 죽어 있던 죽음이 살아난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도래했다. 하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 역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이번 장례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작동했다. 첫 번째가 고인접견이라 불리는 ‘뷰잉(Viewing)’이다. 관 뚜껑을 열어 보인다. 고인이 살아왔던 삶의 나이테를 헤아린다. 두 번째가 ‘조문(弔問)’이다. 이번에는 고인이 아닌 상주와 유가족을 바라본다. 그들의 슬픔을 읽는다. 같이 운다. 마지막 운구에 앞서 유골함을 붙잡고 흐느낀다. 위로를 전한다. 깊은 공감이다. 슬픔이 교환되는 순간 일체가 된다. 세 번째가 ‘취토(取土)’다. 흙을 손에 움켜쥔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 3:19) 말씀을 떠올린다. 고인과 유가족을 향하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독백이 아닌 고백이다. 돌이킴이 뒤따른다. 다짐과 소망이 있다.
세 차례 중 어느 순서 하나만 참여해도 죽음이 2인칭으로 다가온다. 이 세 번의 순서를 다 참여해 낸 고인의 손녀가 내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여섯 살의 이로미였다. 로미는 하염없이 우는 엄마의 눈물을 말없이 닦아주기도 했다.
혹여 할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을까 봐 저지하는 아빠에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야”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묻는다. “안 무서워?” 로미가 단호하게 답했다. “왜 무서워!” 다시 할머니 어떠냐고 묻는 할아버지에게 로미가 말한다. “할머니 예뻐”

내 눈에는 로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천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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