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3-03-20 17: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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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성복은 글을 쓸 때 진지함, 측은함, 장난기 이 3가지를 염두에 둔다고 했다. 나는 강의에도 삶에도 이것이 적용된다고 여긴다. 여기에서 진지함은 ‘로고스(logos)’다. 측은함은 ‘파토스(pathos)’다. 나아가 장난기는 ‘에토스(ethos)’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마태복음 15:21~28)도 정확하게 이 세가지를 지니고 있다.
여인에게는 ‘애절함’이 있었다. 자신을 두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아픈 것은 딸인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함으로 그 처절함을 겹으로 드러낸다. 거기다 큰 소리로 전달했다. 파토스(pathos)다. 측은하기 그지없다.
여인은 진지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다.” 정확한 사실을 알린다. 여인의 로고스(logos)였다. 거절당하는 순간은 ‘엎드려’ 구했다. 여인의 로고스가 간절함으로 표현되는 순간이다. 언어와 표정 몸짓이 하나가 되어 진지함을 더했다.
이런 여인에게 돌아온 것을 뜻밖에도 ‘개’의 비유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못하다.” 바로 이때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 여인은 ‘장난기’로 되받아친다. “옳소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그러면서 비틀기가 나온다. 절묘하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이 때 예수님이 비시시 웃어 버린다. 기막힌 에토스(ethos)다. 난공불락의 요새도 ‘장난기’ 한 방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본다.
본문은 말한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나는 내 말이 너무 로고스에만 치우쳐 있지 않는가를 반성한다. 동시에 내 말이 로고스는 빠진 에토스만으로 가득 차 가볍지 않는가를 돌아본다. 파토스의 눈물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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