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절차는 입관(入棺)으로 시작된다. 입관 전, 염습(殮襲)이 있다.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힌다. 습(襲)이라 한다. 운명한 다음 날 습을 한 시신을 염포로 싼다. 소렴(小斂)이다. 옷과 이불로 관의 빈 곳을 채운다. 대렴(大殮)이다. 유교식 상례절차다.
대렴의 이유를 주자학의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이렇게 밝힌다.
“옷과 이불은 육신이 썩어도 형체는 깊이 감출 수 있어 사람들이 혐오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염(斂)’의 한자어가 그 의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거둘 렴’이다. ‘넣다, 저장하다, 숨다’의 뜻이 있다.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을 감춘다는 의미다. 혐오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디에도 ‘결박’한다는 뜻은 없다. 망자의 산자에 대한 ‘예(禮)’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산자들은 결박으로 망자에 대한 ‘폭력’을 휘두른다.
의외로 놀라는 것은 수의(壽衣)와 상복(喪服) 조차도 구분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하긴 평생 한두 번 당하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수의는 고인이 입는 것이다. 상복은 유족들이 입는다. 살아생전 제대로 섬기지 못해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삼베옷이었다. 속죄의 의상이었다. 대신 고인에게는 가장 값비싼 비단으로 입혔다. 망자에 대한 ‘예(禮)’였다. 이런 예는 내팽개쳐지고 죄수복에 결박까지 한다. 그리고 수인번호처럼 숫자가 부여된다. 입관이 끝나자마자 시신안치실에 격리(隔離)된다. 완벽한 죄인 취급이다. 무슨 죄를 그리도 크게 저질렀기에...
서양 장례식의 경우, 고인접견이라 불리는 뷰잉(Viewing)이 매우 중요하다. 고인과 마지막 대면의 시간을 통해 애도에 이른다. 웰다잉(well dying)을 넘어서 힐다잉(heal dying)이 완성된다. 생각해보라. 사형언도를 받은 이도 가족면회는 허락된다. 하지만 한국의 장례는 안치실에 들어서는 순간 철저히 고인과 차단된다. 상실감은 커진다. 슬픔을 드러낼 시간도 없다. 깜깜이 장례식이다. 조문객 접견실에는 가짜 관이 놓여있다. 거기에 마치 고인이 누워있는 듯 화려한 꽃 장식을 한다. 수백만 원이 기본이다. 누구에게 바쳐지는 꽃인가? 허깨비다. 거기다 절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앞선 글에서 밝혔지만 장의 산업이 가져다 준 폐해다. 가족은 한 없이 무능해진다. 병원이 죽음을 주도한다. 이어서 나머지 모든 일은 장의업자들의 몫이다. 교회와 목회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거의 허수아비 수준이다. 장례예식의 줄거리는 이미 장례지도사가 기획한대로다. 목회자는 정해진 시간에 와서 간단한 예배를 인도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깜깜이 장례식이다.
다른 건 몰라도 더 이상 끈으로 수갑을 채우고 결박하지 말자. 평소에 즐겨 입으셨던 옷을 입혀 드리자. 그러면 장례비용도 아끼게 된다. 고가의 수의가 실은 중국산인 것을 알고 소리쳐봐야 소용없다. 장례식장에서는 불후의 명작, 마패의 한 마디가 있다. “마지막 효를 다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평소의 불효자식들이 장례식장에서 뻘짓들을 한다. 비싼 게 효(孝)인줄 안다. 왕창 바가지를 쓴다. 그리고는 그 좁디좁은 관에다 욱여넣는다.
이제라도 서양처럼 큰 관을 쓰자. 그래서 편안하게 누우실 수 있도록 팔도 펴 드리자. 사진에서 보듯 6각형 관은 어깨가 넓은 서양인들의 체질에 맞게 제작된 것이다. 그들의 성리학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각관 밖에 없다. 천편일률이다. 거기에 일반관과 특관만 있다.
아서라. 말자. 장례문화, 거창하게 떠들지 말고 이 작은 것부터 바꾸어 보자. 의미도 모른 채 관행적으로 따라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인가? ‘알았다고?’ 알았다면 공범이다. ‘몰랐다고?’ 그게 무식이고 무능이다. 이제라도 고치자. 목회자들에게 건네는 자성의 소리다. 서로 화내고 싸우지 말자. 싸울 일은 따로 있다. 나도 몰랐었다.
(염습하는 사진들은 차마 끔찍해서 올리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유별나다. 오픈된 입관 모습과 뷰잉하는 장면을 선명히 볼 수 있다. 이미지는 구글에서 따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