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의 요즘생각

작성자 admin 시간 2020-06-30 15: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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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뜻하는 영어 스토리(story)’는 라틴어 스토레이(storey)’에서 왔다. ‘벽에 써놓은 이야기라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미술작품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기쁘고 어떤 이야기는 슬프다. 가장 슬픈 이야기가 있다면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아케다(Akedah)’. 아케다는 결박이라는 뜻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외아들 아들을 묶었다. 제단에 바치기 위해서다.
그림은 언제나 어떻게 그려내느냐어떻게 보느냐가 존재한다. 전상직교수(서울대)는 앙각구도인지 부감구도인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짐을 이렇게 표현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제재로 한 그림들이 한결같이 앙각 구도를 취한 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진 그에 대한 감사와 경외감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사람의 시선이다. 반면 부감 구도는 내 짧은 소견에 인간을 사랑하기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준 신의 시선이다. 못 박힌 손과 발, 머리에 씌워진 가시관, 창에 찔린 옆구리에 흐르는 성혈, 그리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건장하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그려진 그리스도는 신의 마음속에 각인된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이리라.”
창세기 22장의 아케다는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와 대비된다. 둘 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에게 칼을 들이민 아버지와 아들을 품은 아버지가 있다.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슬픈 아들이 있고 아버지가 차려놓은 잔칫상 앞에 감격해 하는 아들이 있다.
내 소견에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아케다는 아들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돌아온 탕자에 시선을 맞추다 보면 아버지가 사라진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끝없는 사랑으로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다. 렘브란트는 이것을 잘 묘사했다. 거꾸로 아카다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닌 이삭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이 모아진다. 노년에 낳은 아들까지 갖다 바치는 아버지 앞에 아들은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하다. 아니다. 우선 이삭의 나이가 적지 않았다. 이삭이 16, 아브라함이 116, 사라가 107세였다.
이삭은 얼마든지 아버지의 부당한(?) 행동을 제어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경의 한 문장이 이를 증언한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22:6) 배철현교수(고전학)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한다.
히브리어 원문을 음역하면 와-엘렉 셔네헴 야흐다우(way-yēlēk šənêhēm yaḫdāw). 이 문구는 8절 마지막 부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아마도 구약성서 전체에서 똑같은 문구가 한 절 걸러 이렇게 등장하는 예는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둘은 한마음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힘센 아버지와 가엽고 초라한 아들이 아니다. 덥수룩한 수염의 노인네와 건장한 근육질의 청년이 옳다. 기꺼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이 있다. 죽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순교자의 걸음이다. 배교수의 결론은 명쾌하다.
아케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시험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이삭의 시험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다. 아브라함이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면, 이삭은 희생과 헌신으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
아카다가 더 절절해지는 이유는 또 있다. 샤갈(1887~1985)이 그려 넣은 신 스틸러(scene stealer·장면을 훔치는 사람,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 때문이다. 엄마 사라가 저 멀리서 가슴 졸여 흐느끼고 있다. 창세기에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상상력이다. 내가 샤갈을 좋아하는 이유다.

내 아버지와 내가 써온 또 다른 아케다, 아버지 눈치 살피며 소리죽여 자주 우시던 () 스틸러내 어머니가 보고 싶다. 밤이 깊었다.
(이삭의 희생, 마크 샤갈(1887~1985), 유화, 1965, 230 x 235cm, 프랑스 니스 국립 샤갈 성서박물관
번제 장소로 가는 아브라함과 이삭, 마크 샤갈(1887~1985) 고무를 수채화 그림물감에 섞어 그림으로써 불투명 효과를 낸 과슈, 1931, 62cm×48.5cm 프랑스 니스 국립 샤갈 성서박물관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네덜란드 화가(1606~1669) 유화, 1669, 262cm x 205cm, 상트페테르부르 에르미타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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